본문 바로가기

LEGENDS

파블로 에스코바르 - 마약 카르텔의 제왕, 은 아니면 납(Plata o Plomo)



세계최대 마약조직 메데인 카르텔의 보스, 파블로 에스코바르(Pablo Emillio Escobar Garviria)


1970년대 미국이 반전운동과 공산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을 무렵, 콜롬비아에서는 미국을 상대로 한 밀수가 성행하고 있었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파블로 에스코바르 역시 밀수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큰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거점 경찰들을 매수하여 자신의 사업이 방해받지 않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당시 1970년대 미국에서는 마리화나가 큰 사회 문제였다. 히피 문화의 확산과 반전 운동은 미국내 마리화나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으며 따라서 당시 미국 마약단속국(DEA)은 마리화나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에스코바르 역시 마약 밀매가 돈이 되는 사업임을 깨닫게 되고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운송망을 바탕으로 빠르게 마약 사업으로 확장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는 마리화나가 아닌 코카인을 취급하였고 이는 그가 세계 최대의 마약왕이 되는 계기가 된다.





코카인 밀매는 대성황이었다. 미국에서의 폭발적인 수요가 있었으나 당시 미국에서 코카인은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은 이미 마리화나로 몸살을 앓고 있던터라 마리화나 단속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카인이 대거 미국으로 흘러 들어갔고 이에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다양한 밀매 경로를 개척하며 빠르게 사업을 확장시켜 나간다. 연일 폭주하는 수요로 인해 경비행기의 뒷자석을 모두 마약으로 채워서 미국으로 실어 나르기도 했으며 잠수함을 동원해서 보냈다는 후일담도 있을 정도로 코카인의 힘은 대단했다. 그렇게 그는 콜롬비아 마약 시장의 80%를 점유하며 큰 부와 권력을 축적하게 된다. 특히나 당시 공산주의 급진세력 M-19이 돈을 목적으로 메데인 카르텔의 여동생을 납치, 협박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마약 밀매자들이 모여 MAS(Muerte a Secuestradores: 납치범에게 죽음을)를 결성하게 되었으며 에스코바르가 두목이 되어 메데인 카르텔은 콜롬비아 내 최대 규모 마약조직으로 부상하게 된다. 





Plata o Plomo (은 아니면 납)

그가 이토록 빠르게 밀매 사업을 성장시켰던 요인은 수완이 좋은 것과 더불어 그의 잔인함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딱 두가지의 선택사항만이 존재하였다. Plata o Plomo (은 아니면 납)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칭하는 이 단어는 그가 사업을 확장시키며 방해가 되는 요소들에 대해 뇌물(은) 또는 총알(납, 죽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경찰과 군부, 정치인들을 뇌물을 통해 매수하고 포섭에 응하지 않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무차별하게 살인을 저질렀다. 그의 잔인한 행보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으며 그의 마약 사업은 아무런 방해없이 활황세를 유지해나갔다. 당시 하루에 6000만 달러를 벌 정도였으며 후에 그는 세계 7위 부자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무서울 것 없어 보였던 그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사건은 우연히도 그가 정치 권력에 욕심을 내면서 시작된다. 그는 정계에 진출할 목적을 갖고 고향 메데인에 무상가옥, 운동장, 병원 등을 지어줬으며 지역 신문사를 매수하여 마약왕이 아닌 영웅으로 추앙받기 시작한다. 결국 이를 바탕으로 에스코바르는 1982년 자유당 예비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하지만 그이듬해 당시 법무장관 라라 보니아가 마약왕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그는 의원직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격노한 에스코바르는 암살범을 사주해 법무장관을 살해한다.(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그는 끝없는 도망자 신세로 전략하게 된다.)






자국 내 법무장관이 살해 당했음에도 콜롬비아 정부에서는 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 마약단속국에서도 지원을 재차 요구하지만 미국에서는 계속 거절을 하였다. 표면상으로는 자국 내 마약 전쟁에 미국이 개입해야 할 당위성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재차 언급했듯이 당시 미국 내에서는 공산주의가 문제였지 마약이 문제였던 시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한 번에 뒤집는 사진이 발견된다. 당시 미국까지 마약을 비행기로 운반했던 터라 중간에 한 번 급유를 위해 경유를 해야 했는데 그 경유지가 공산주의 국가였던 것이다. 미국 내에서는 이제 마약 밀매가 공산주의와 결부된 조직적 범죄로 인식되었고 이에 미국의 전폭적인(군사적인) 지원이 시작된다.






미국 특수부대가 투입하여 마약 생산지, 운송지 등에 대대적인 공습을 퍼붓는다. 13톤의 마약을 압수해 불태우는 등 큰 타격을 입혔히는 듯 보였으나 그 해 20억 달러를 벌어 들이며 마약 밀매는 멈출줄을 모른다. 그런 에스코바르가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콜롬비아 미국간 범죄인인도조약이었다. 1985년 미국의 요청에 의해 콜롬비아 정부는 자국내 범죄자를 미국 내 감옥에 가둘 수가 있게 되었다. 자국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들도 미국에 가면 일개 범죄자에 불과했으므로 이에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물론 파블로 에스코바르 역시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의 범죄를 증명할 서류들 역시 법무부 청사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에스코바르는 자신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급기야 M-19을 사주하여 법무부 청사에 대한 테러를 감행한다. 당시 범죄자 인도 조약을 체결할 기구가 법무부 청사인 이유와 에스코바르의 범죄를 입증할 증거들이 모두 거기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6시간에 걸친 전투로 12명의 판사를 포함한 95명의 인질이 사망하는 최악의 참사가 발생한다. 물론 증거물들은 모두 불타 사라졌다.





그의 악행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1989년에는 범죄자인도조약을 지지하며 자국 내 마약 범죄자들을 비난하던 카를로스 갈라를 포함한 대통령 후보 3명을 암살하였다. 암살을 자행하기 위해 일반 승객 100명이 타고 있던 여객기를 폭발 시켜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기도 한다. 보고타와 메데인에서는 연이어 폭탄 테러가 발생하였고 3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600명 이상이 경찰이 살해 당했으며 메데인 지역에서만 3,500명 이상이 살해 당한 것으로 기록된다. 말그래도 은 아니면 납이었다.





광기와 같은 이러한 살인은 점점 극에 치닫게 되었고 이에 1990년 새롭게 대통령으로 취임한 세자르 가비리아 대통령은 메데인 카르테과의 협상을 시작한다. 바로 범죄인인도조약의 폐기와 감형을 조건으로 자수를 요구한다. 결국 에스코바르는 자수를 하게 되면서 사태는 일단락 되는 듯 보였다. 허나 에스코바르는 수감된 직후에도 감옥을 호화 별장처럼 꾸미고 교도관들을 포함한 전인원을 자기 사람들로 뽑았다. 또한 수감된 이후에도 마약사업을 계속 관장하는 등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이에 대한 미국의 압박이 거세지고 결국 콜롬비아 정부에서도 에스코바르를 다른 교도소로의 이감을 추진하자 이를 먼저 포착한 에스코바르는 유유히 탈옥하여 자신의 본거지인 메데인에 은신한다.





메데인 내에서는 그간 영웅으로 입지를 다져났기에 그의 평화로운 은신 생활은 계속 유지되나 싶었다. 허나 가족을 걱정한 나머지 보고타에 있던 아들과 통화를 하며 위치가 발각되었고 그 즉시 미국 특수부대와 콜롬비아 특수부대가 투입하여 에스코바르를 사살하였다. 역사상 가장 잔인한 마약왕의 최후였다.



-Fin-

반응형